보스턴 마라톤 참가기 7
해외 마라톤‘정봉수 신화’의 허실
인체에서 글리코겐은 자동차 연료와 같다. 기름이 떨어지면 차가 멈추는 것처럼 인체도 글리코겐이 고갈되면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밥을 먹으면 소화 과정을 거쳐 글리코겐으로 저장된다. 저장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자동차 연료 탱크에도 기름이 무한정 들어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30㎞ 정도 달리면 대체로 인체에는 글리코겐이 거의 바닥이 난다. 그래서 마라톤에서 30㎞를 넘으면 데드 포인트, 즉 사점(死點)에 직면한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혈당치도 뚝 떨어진다.
이때부터는 체내에 축적된 지방이 글리코겐 대신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글리코겐이 쉽게 불이 붙는 고급 휘발유와 같다면 지방은 묵직한 중유처럼 느리게 탄다. 지방을 연료로 사용하면 인체라는 엔진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아 그만큼 고통을 느낀다. 엘리트 선수는 지방을 에너지로 쉽게 활용하도록 단련됐거나 선천적으로 그런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글리코겐이 고갈될 때 파워젤을 먹으면 효과가 나타난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파워젤의 당분이 금세 글리코겐으로 바뀐다는 과학적 근거는 확실치 않다. 심리적 효과에다 혈당치를 높여주는 효능이 있는 정도로 알려졌다.
글리코겐 저장 용량을 늘리는 방법이 있긴 하다. 이른바 ‘식이요법’을 통해서다. 다음 일요일에 경기가 열린다면 월, 화, 수요일 사흘엔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하고 목, 금, 토요일 사흘 동안은 그 반대로 탄수화물을 주로 먹는다. 첫 사흘간 고기와 물만 먹으며 운동하면 몸에 든 글리코겐이 거의 소진된다. 글리코겐을 고갈시킨 뒤 나머지 사흘간 밥, 빵, 국수 등 탄수화물을 집중적으로 먹으면 글리코겐이 빵빵하게 저장된다는 원리다. 휴대전화 배터리를 완전히 방전시킨 뒤 충전하면 충전량이 극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미국에서 1970년대에 알려진 인체의 보상효과(compensation effect)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탄수화물이 모자라면 인체는 그것을 더욱 강렬하게 요구하는 상태로 바뀌며, 그때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저장을 극대화한다는 원리다.
한국에서는 고(故) 정봉수 감독이 일본에서 배워온 식이요법을 이봉주 선수 등에게 적용해 재미를 봤다. 언젠가 TV 다큐멘터리에서 이봉주 선수의 식이요법 과정이 방영됐다. 억지로 고기를 먹는 장면을 보니 안쓰러웠다. 온돌방에서 선수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전기 그릴판에서 구운 쇠고기를 소금도 없이 씹어먹는 것이었다. 이봉주 선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처음 한두 끼는 몰라도 사흘 동안 고기와 물만 먹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봉주 선수는 “고기가 생고무를 씹는 것처럼 딱딱하고, 마라톤 연습보다 식이요법이 더 힘들다”고 고백했다. 이런 극단적인 식이요법은 다분히 ‘정봉수 신화’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식이요법이 경기력 향상에 도움을 줬는지 여부가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과적으로 좋은 기록이 나오니 식이요법이 반복된 것이다.
결과가 좋다고 과정이 모두 높이 평가돼서는 곤란하다. 단백질 위주라고 쇠고기만 먹으란 법은 없다. 닭고기, 생선, 달걀 등을 맛있게 조리해서 먹으면 되지 않나. 소금기 없이 먹는 것도 과학적 근거가 없다. 그 고통스러운 식사 때문에 쌓일 정신적 스트레스는 신체 컨디션에 악영향을 미칠 것임이 분명하다. 아마 정봉수 감독은 선수들의 느슨한 정신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인내심 수련 차원에서 무염 고기를 먹인 게 아닐까. 한두 번으로 그쳤어야 했다.
필자의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정봉수 신화’가 국내 스포츠 학자나 당시 언론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을 듣지 못했다. 무관심 또는 무지의 탓이 아닌가 한다.
마치 정봉수 감독이 이를 창안한 것처럼 보도하는가 하면 그 과정을 흥미 위주로 다뤘다. 선수들의 건강을 점검하는 주치의는 그런 이상한 식이요법에 대해 왜 방관했는지 묻고 싶다. 미국, 일본의 정상급 선수 중에도 식이요법을 채택하는 선수가 더러 있는데 정봉수 스타일은 아니다. 아프리카 선수들은 식이요법과는 거리가 멀다. 일부 선수들은 정 감독의 폭력적인 제재가 두려워 고기를 억지로 먹긴 했으나 소화를 시키지 못해 화장실에서 토했다고 한다. 김이용 선수는 그것 때문에 위염을 얻어 선수생활을 중단할 위기를 겪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고비,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
파워젤을 하나 먹고 나니 힘이 솟는다. 이제 곧 가파른 오르막인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이 나타날 지점이다. 그 길 옆에 존 켈리의 동상이 서 있다. 매사추세츠 주 출신인 그는 23세 때 보스턴 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후 84세 노인 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 대회에 참가했다. 61회 참가에 58회 완주, 2회 우승, 7회 준우승의 위업을 이룬 보스턴 마라톤의 영웅이다. 동상은 특이하게도 두 사람이 달리는 모습으로 제작됐다. 왼쪽 동상은 그의 청년 시절의 모습이고, 오른쪽 동상은 노년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는 마라톤을 통해 불굴의 정신을 보임으로써 존경을 받았다.
‘상심의 언덕’은 한국에서는 한때 ‘심장파열 언덕’이라 잘못 번역됐다. 심장이 파열될 듯이 가파르게 올라야 하는 언덕이라는 뉘앙스로 들린다. 이름의 유래는 1936년 보스턴 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5년 대회 우승자인 존 켈리는 32㎞ 지점까지 선두로 달리다가 이 언덕에서 엘리슨 브라운에게 추월당해 낙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브라운이 우승했고 켈리는 5위로 골인했다. ‘보스턴글로브’ 신문은 ‘켈리를 상심시키다(Breaking Kelly´s heart)’란 기사를 보도했고 그때부터 이 언덕에 그 이름이 붙었다. 실제로 달려보니 가파르긴 했다. 500m가량 오르막이 계속되긴 했으나 심장이 터질 만큼의 심한 비탈은 아니었다. 상심이라는 말은 요즘 잘 쓰이지 않으므로 ‘실망의 언덕’ 정도로 번역하면 좋겠다.
이 언덕을넘어서니 오른편에 명문 보스턴 칼리지의 고색창연한 캠퍼스 건물이 나타난다. 이제 나머지 10㎞ 거리는 완만한 내리막이고보스턴 시내로 접어든다. 도로 폭이 넓어지면서 응원 인파가 늘어났다. 시내의 주요 간선도로에 접어드니 시민들의 환호성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다.북, 심벌즈 등 타악기를 들고 나와 마구 두드리는 중년 남자가 있는가 하면 전자 기타를 치는 젊은이들이 곳곳에 보인다. 실용음악으로 유명한 버클리음대가 보스턴에 있어 그곳 재학생들이 응원하러 나오지 않았을까.
현지 시각으로오후 1시30분이 넘었다. 3시간30분 이상을 달린 셈이다. 대회에 참가하기 전, 응원 참여 주민이 모두 60만명에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장됐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풀코스 거의 전 구간에 늘어선 주민들의 행렬로 봐서 사실임을 확인했다.
드디어피니시 라인! 3시간37분29초
대로에 접어들었다. 저 멀리 피니시 라인이 보인다. 아무리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즐달’ 모드로 천천히 달렸다지만 한낮이 되니 기온이 오르면서땀을 제법 흘려 피로가 엄습했다. 묵직한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양팔을 번쩍 들며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드디어 완주. 3시간37분29초,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기록이다. 중간 중간에 수첩을 꺼내 취재 내용을 메모했기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린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자원 봉사하러 온70대 여성이 활짝 웃으며 완주 기념메달을 목에 걸어준다. 체온 보호용 비닐을 씌워주는 자원봉사요원 노인도 나타났다. 바나나, 초코바, 베이글,사과 등이 든 간식 봉지도 건네준다.
출발점에서맡긴 짐 가방을 도착점에서 찾아 옷을 갈아입었다.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고…. 필자는풀코스를 20회 가까이 완주했다. 10회 이상 넘어가니 몇 번 완주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대다수 달림이들은 “첫 완주 직후에 눈물이 왈칵났다”고 고백한다. 필자는 감정이 메말라서인지 무덤덤했다.
보스턴 대회이든, 동네 강둑이든 달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굳이 보스턴 마라톤에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하는 달림이도 있다. 틀린 말은아니다. 하지만 명품 대회는 그만큼 브랜드 가치를 간직한 것을 어찌하랴. 인간은 어차피 상징적 동물 아닌가. 마라톤에서의 전통, 명문, 권위 등을상징하는 키워드로 ‘보스턴’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마라톤에 입문한 사람은 대부분이 보스턴을 메카로 여기고 언젠가는 순례해야겠다며열병을 앓는다.
보스턴 대회에참가하려면 조직위원회에 인터넷으로 신청하거나 국내 대행사에 맡기면 된다. 필자는 대행업체인 마라톤여행 전문업체를통해 신청했다. 기준기록에 도달하는 완주증명서, 여권, 미국 입국 비자 등을 팩스로 보냈고 패키지 여행경비와 마라톤 참가비를 송금했다. 전문업체로는여행춘추와 에스앤비 두 업체가 영업 중이다.
지난 4월18일 금요일 밤에 보스턴 숙소에 도착하니 ‘한국 마라톤 참가단 환영’이라는 한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월요일 오전에대회가 열리므로 토, 일요일 이틀 동안 시차 적응 시간이 있다. 토요일 아침, 일요일 아침엔 한국 참가단 60여 명이 호텔 마당에 모여 체조를하고 인근 호숫가 도로를 1시간가량 조깅하며 몸을 풀었다. 보스턴 시내에 가서 번호표를 받거나 마라톤 코스를 버스로 둘러보는 시간도 있었다. 짬을내 하버드대, MIT대 등 명문 학교 캠퍼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자녀와 함께 온 가족 단위 참가자들도 눈에 띄었는데 자녀들은 명문대 방문이 여행의주목적인 듯했다. 호텔 외부에서의 식사는 대체로 한식당에서 해결했다. 참가자 대부분이 40대, 50대 연령층이라 여행사측은 양식보다는 한식을 선택했다.
대회 당일 새벽, 미국 호텔 안에서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 벌어졌다. "한국인은 찰밥을 든든하게먹어야 잘 달린다”는 속설에 부응하기 위해 여행사 측에서 새벽 5시에 찰밥과 나물 반찬이 든 도시락을 나눠준 것이다.국물로 마시라고 작은 컵라면도 하나씩 곁들여서. 호텔 방에서 정갈하게 마련된 도시락을 먹고 커피를 마신 다음 버스를 타고 오전 7시에 출발지점으로이동했다. 미국 현지인보다 편하게 가는 셈이다. 홉킨턴 중학교 운동장에 내려 한국 참가단끼리 기념촬영을 했다. 전북 임실에서 온 임실마라톤 동호회회원 12명은 ‘임실 치즈’를 홍보하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사진을 찍는다.
넓은 잔디밭에는길이 100m, 폭 25m에 이르는 초대형 천막이 설치됐다. 천막 안팎에서 참가자들은 저마다 출발 준비를 했다.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베이글, 바나나, 에너지바, 물 등으로 아침식사를 하는가 하면 느긋이 누워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사람도 보인다. 슬리핑 백에서잠자는 젊은이도 간혹 있다. 아마 여기서 밤을 새웠나 보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겉옷을 벗어 가방에 넣고 짐을 버스에 맡긴다. 이 버스는 도착점에미리 가 있게 된다.
이국땅에서벌인 완주 축하연
대회가 끝난후 한국 참가단은 완주 기념 자축연을 벌였다. 완주의 감격에 젖은 일부 참가자들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 한국적풍경을 연출했다. 그래도 마라톤이 몸에 밴 이들이어서 과음은 하지 않는다. 각자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하는데 나이와 직업, 마라톤기량이 다양했다. 최연소자는 서울 평화시장에서 근무하는 이병도(24)씨, 최연장자는 서울 정릉동에 거주하는 박종언(73)씨였다. 직업은 변호사,의사, 대학교수, 법무사 등 전문직에서부터 공무원, 회사원, 농업, 자영업 등 여러 직종 종사자가 망라됐다.
경남 통영에서온 외과의사 강성봉(49)씨는 “보스턴에 오기 위해 병원 일을 마치고 밤차로 상경했고 귀국길에도 인천공항에 도착하면밤차로 통영에 내려가 이튿날부터 근무해야 한다”며 보스턴 대회 참가에 쏟는 열정을 나타냈다. 대회 기간에 회갑을 맞은 정면기(60)씨는 가족들과함께 미국에 와 완주기념 축하연 자리에서 케이크를 자르며 조촐한 회갑연을 겸했다.
대회를 마친이튿날인 4월22일 아침, 호텔 로비에는 ‘보스턴글로브’ 신문이 수북이 쌓였다. 4개 섹션 가운데 2개 섹션이 마라톤기사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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